본문 바로가기

글쓰는 빌라

어버이날



엄마! 제가 최초로 기억하는 엄마와의 생활은 7살 때예요.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중학교 시절의 일 조차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제겐

꽤 굉장한 기억입니다.




좋지 않은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 보면

이미 저는 어떤 아줌마를 ‘엄마’라고 부르는 생활에 익숙해져있었고

그 아줌마에게 저는 "딸"이었어요.

생각해보니 헛갈려서

아빠에게 ‘엄마’, 엄마에게 ‘아빠’라고 부르던 때도 있었네요.

‘엄마’와 ‘아빠’의 구분이 어려웠어요.

이해력이 부족했던 것일까요?

저는 저보다 나이가 조금 많으면 ‘언니’, ‘오빠’고

많이 많으면 ‘누나’, ‘형’인 줄 알았을 정도였잖아요.

엄마 아빠께 ‘누나’, ‘형’ 안 한 게 그나마 다행이죠.




그때 엄마는 다른 애들에게는 벌써 왔다는 ‘입학통지서’ 가

제게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걱정하고 계셨죠.

어쨌든 제게도 그 ‘입학통지서’가 왔고

저는 무사히 국민학생으로 입학했습니다.

이후에, 초등학생으로 졸업했지만 그건 제가 의도한 바는 아니에요.




저는 제 어린 시절을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엄마는 절 쭉 보고 계셨죠.

혼자 어둡고 구석진 곳에서 책만 주구장창 읽어서

우리 아이가 자폐증이 아닐까 걱정하셨다죠.

그래서 제가 그 시절의 기억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도 이렇게 평범한 아이로 자라나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엄마한테마저 ‘피도 눈물도 없다’는 충고를 들을 만큼

감정은 조금 결여되어있지만요.





그리고 아빠! 정말 죄송한 일이지만 아빠와의 기억은 거의 없네요.

7살 때 아빠에게 뺨 맞은 기억은 나요.

그때의 체벌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는 것도요.





물론 종종 장난을 빙자해

사자꺾기와 트위스트라는 기술을 거신 것은 몸이 기억하고 있어요.

다른 애들은 오빠한테 당하는 일을 저는 아빠한테 당해버렸죠.

친구들은 오빠의 장난을 아빠에게 일러바치곤 했는데

저는 아빠한테 당한 터라 하소연 할 데가 없다는 게 답답했어요.





가끔은 아들처럼, 가끔은 딸처럼.

저는 아빠에게 멀티자녀로 간간이 사랑을 표현했는데,

아빠는 왜 이종격투기기술로만 사랑을 표현하셨나요?

어쨌든 튼튼한 아이로 자라나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은근히 맷집이 늘었어요.





제가 중학교 3학년 때는 아빠에게 고백을 했다가 차였었죠.

"엄마랑 이혼하고 나랑 결혼해줘" 라는

여중생의 귀여운 프로포즈를 차갑게 거절하셨죠.





그때 거절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때의 아빠는 원빈을 뺨쳤지만 지금의 아빠는 너무 늙었잖아요.

어쨌든 아빠가 내 눈 높여놨으니까

나 노처녀 되면 아빠 탓이에요.

이제 와서 책임진다고 엄마랑 이혼해도 전 받아주지 않을 거예요.





‘엄마 사랑해요.’ ‘아빠 사랑해요.’ 이런 말 너무 쑥스러워요.

제가 하면 되게 가식적으로 들리잖아요.

‘엄마 사랑해요, 나 용돈 떨어졌어요.’

‘아빠 사랑해요, 만원만 주세요.’ 이렇게 들리니까요.




그냥 저는 제 식대로 말하는 거예요.

엄마 아빠 요리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요.

엄마가 해주는 닭볶음탕.

아빠가 해주는 딸기쨈 넣어 볶은 오므라이스.





저는 절대로 요리 배우지 않을 거니까.

저는 엄마 아빠 요리만 먹고 살 거니까.

엄마 아빠 없으면 전 굶어죽어요. 그러니까 오래사세요.





그리고 있잖아요, 저번에 주신 용돈 다 써버렸어요.

그러니까 한 번만 말할게요. 사랑해요.






- 슬기 올림

'글쓰는 빌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9) 2011.02.21
짬뽕  (3) 2011.02.21
[창작] 관음본능  (15) 2010.06.02
[창작] Shake That  (16) 2010.06.02
[수필] 패녀(敗女)의 체육대회 응원기  (10) 2010.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