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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가 번역하는 공포

[2ch] 냉장고 열고 닫기






[2ch] 냉장고 열고 닫기





3월 26일 (일)


20세기 마지막 해.


바라고 바라던 취업도 결정됐고,

오늘부터 일기를 쓰려고 한다.


이제 나도 간신히 사람다운 사람이 되었는데

사람다운 사람이라면 보통 뭘 해야 할까,

안 돌아가는 머리를 열심히 굴려본 결론이 일기다.

오랫동안 부모님 밑에서 기생해온 대가는 생각보다 크다.





4월 1일 (토)


오늘부터 출근했다.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가전제품회사가 내 직장이다.


어제까지 아무 쓸모도 없는 놈이었는데

오늘부터 누군가에게 필요한 인간이 된 거다.

이토록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게 얼마만일까.


첫날이 토요일이라 간단한 설명만 듣고 퇴근했다.





4월 3일 (월)


처음 맡은 일은 냉장고 문 내구 테스트다.

냉장고 문을 몇 번까지 열고 닫아도 되는지

한계를 실험하는 것이다.


작업은 지극히 단순하다.

일정한 힘을 주고 문을 열고 닫는다.

그리고 열고 닫은 횟수를 센다.


학력이 부족한 내가 이렇게

첨단 기술에 공헌하다니 매우 자랑스럽다.


오늘은 2만 5천 번 열고 닫은 후 퇴근했다.





4월 10일 (월)


내구 테스트를 시작하고 1주일이 흘렀다.


문은 고장은커녕, 처음 그대로다.

이렇게나 튼튼한 문을 만드는 기술이 있다니

우리 회사는 정말 훌륭한 회사다.

새삼스럽게

이런 회사에 취업한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느꼈다.





4월 25일 (화)


생전 처음으로 내 힘으로 돈을 벌었다.


회사의 배려로

냉장고를 정가보다 싸게 넘겨받았다.


집에 와서 엄마한테

감사의 마음을 담아 냉장고를 선물했다.

내가 지금

이 냉장고의 신형을 개발하는 걸 돕고 있다고 했더니

울면서 기뻐했다.


첫 월급, 첫 효도, 이렇게 좋은 날이 또 있었던가.





5월 12일 (금)


진짜로 튼튼한 문이다.

100만 번은 열고 닫았는데도 한 치의 일그러짐이 없다.


요즘 들어 문을 열고 닫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아서

잠이 쉽게 안 온다.





6월 19일 (월)


한밤중에 눈이 떠졌다.

팔이 문을 열고 닫는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7월 15일 (토)


가끔은

어디부터가 문이고 어디까지가 팔인지 모르겠다.





8월 30일 (수)


갑자기 냉장고에 나비가 들어갔다.

문을 열고 닫는 걸 잠시 멈추고

나비를 찾아봤지만

끝내 못 찾아냈다.





9월 3일 (일)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요정과 눈이 마주쳤다.

역시 나비도 환각이었구나.





9월 28일 (목)


냉장고 요정이 나날이 보기 흉해진다.

그 모습이 꼭 귀신같다.





10월 16일 (금)


꿈에서도 문을 열고 닫는다.

꿈과 현실을 구별 못 하겠다.





11월 22일 (수)


일하다가 문득 깨달은 건데

어느새 1주일이나 지나 있었다.





12월 31일 (수)


올해도 끝이다.

아무튼 엄청 튼튼한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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