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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빌라

저는 봄이 싫어요





저는 봄이 싫어요






이제야 봄이 오네요.





사실 저는 봄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전 여름이 제일 좋아요.

산이 푸르고 바다가 파랗고 공기가 뜨거운 여름이 제일 좋습니다.

여름에는 사물이 더 선명해 보이고 냄새가 더 진하게 풍기고 소리가 더 강하게 들립니다.

여름은 제가 살아 숨 쉬고 있구나, 하는 걸 느끼는 계절입니다.

여름은 매년 그렇게 강하게 저를 뒤흔들고 떠납니다.





하지만 봄은 다릅니다.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갑니다.

예쁘게 피었다가 이내 지고마는 꽃잎이 슬픕니다.

사람들 머리 위에서 살랑살랑 춤을 추다가

발밑에 떨어져 이리저리 구르는 꽃잎들.

매년 되풀이되는 그 끝없는 쓸쓸함이 아픕니다.

제게 봄은 너무 가슴 시린 계절입니다.





봄이 오면 꼭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못 본지 너무 오래 되서 얼굴조차 흐릿하지만,

딱 두 번 들었던 목소리만은 아직 똑똑히 기억합니다.

가늘고 높고 웃음기가 가득한, 조금은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였습니다.





그 사람은 우리 동네 바보 아저씨였습니다.

바보 아저씨가 우리 동네에 살았던 건지 아니었던 건지는 확실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 아저씨는 겨울에는 전혀 보이지 않다가, 봄만 되면 나타나곤 했습니다.

그 아저씨는 항상 어떤 할아버지와 함께 다녔습니다.

아주 나중에야 그 할아버지가 바보 아저씨의 아버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그 아저씨를 데리고 너덜거리는 리어카를 끌며 폐지를 주우러 다녔습니다.

할아버지는 슬렁슬렁 동네 한 바퀴를 돈 다음에

낮이건 밤이건 동네 슈퍼 앞에 자리를 잡고 술을 드셨습니다.

할아버지가 술병을 비우는 동안 바보 아저씨는 동네를 배회했습니다.





처음 아저씨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은 제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봄이었습니다.





저는 원래 살이 먹은 만큼은 안 찌는 체질입니다.

시쳇말로 “연비가 나쁜” 사람이죠.

키는 항상 작았습니다.

체중은 계속 보통 체중을 유지했지요.

그런데 고등학교 때는 좀 달랐어요.

엄청난 스트레스 때문에 하루에 대여섯 끼니를 먹었으니까요.

지각을 할지언정 아침밥은 꼭 챙겨먹고,

점심 먹기 전에 매점 가서 빵 사 먹고,

점심 먹고, 간식으로 빵 사 먹고, 저녁 먹고, 또 빵 사먹고,

자기 전에 라면 끓여 먹고...

뚱뚱까지는 아니지만 통통해졌습니다.





그날, 그러니까 그게...

학교에 가던 중이었는지 집에 오던 중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네요.

아무튼 초코우유를 한 손에 들고 빨대로 쭉쭉 빨아 먹으며 동네 슈퍼를 지나치던 그 때.

바보 아저씨가 제 앞을 가로 막았습니다.

무서웠습니다.

해코지라도 당할까봐 애써 못 본척하며

그 아저씨를 빙 둘러서 피해 갔습니다.

시선은 정면에 두고 가던 길을 계속 갔습니다.

그러자 제 등 뒤로 그 아저씨의 목소리가 날아와 꽂혔습니다.









“그러니까 살이 찌지!”
 

...


‘아놔... 이 쉬벌쉣키가...’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저는 속으로 욕을 읊조리며 그 자리를 얼른 피했습니다.

'내가 그냥 속 편하게 군것질이나 하고 뒹굴거리는 줄 아나보지?

공부하기 싫은데 자꾸 공부하라고 책상 앞에 붙들어 놔서 스트레스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어린 마음에 꽤 큰 상처를 입었지만

그 후로도 저는 계속 대여섯 끼니를 섭취하며 고등학교 생활을 마쳤습니다.

아참, 대학만 가면 살 빠진다는 소리는 절대 믿지 마세요.

제 살은 대학교 3학년 때 휴학하고 알바하다가 빠졌거든요.





저는 공부를 너무 못해서 지방대에 갔습니다.

처음에는 성공회대 일문과에 가고 싶었어요. 면접도 봤는데 떨어졌죠.

나머지는 대충 집어넣었던 데라 가기 싫고

그냥 근처 전문대 일문과 붙었길래 거길 갈 생각이었는데

아빠가 너무 반대를 하셨거든요.

전 아빠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니까 어쩔 수 없었어요.

그렇게 억지로 간 지방대지만 일단 교수진이 무척 좋았고 국문과 수업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작가의 꿈을 키워나갔고 처음으로 공부가 재밌다는 걸 느꼈습니다.

대학교가 너무 멀어서 자취를 했고, 자연히 그 바보 아저씨를 꽤 오래 못 봤습니다.





그 다음에 그 아저씨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은 제가 대학교 4학년이 되던 봄이었습니다.





주말이라 집에 올라왔었죠.

원래 여성스러운 옷을 잘 안 입는 편인데

그날따라 무척 여성스러운 원피스를 입고,

꽤 굽이 있는 구두를 신고,

별 쓸모를 못 느끼겠는 작은 핸드백을 들고,

화장까지 곱게 하고 나선 참이었습니다.





골목을 도는 순간 바보 아저씨와 마주쳤습니다.

그때도 저는 전처럼 그 아저씨를 피해서 갔습니다.

그 아저씨가 또 제 뒤에 대고 말을 건네더군요.





“이젠 아가씨 티가 나네?”





고맙다고 인사를 드려야 할 지,

근데 나 고딩 때는 왜 그딴식으로 말했느냐고 따져야 할지,

그냥 한 번 웃어 줘야 할 지,

욕을 해야 할 지.

이럴 땐 어떤 얼굴을 해야 좋을 지 몰라 얼른 택시를 잡아탔지요.





그런데 역시 그때 웃었어야 하지 않나, 싶어요.

그해 봄 이후 바보 아저씨는 우리 동네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거든요.





이런저런 소문이 돌았어요.

집에 불이 붙어서 타 죽었다더라.

양아치들한테 잘못 걸려서 맞아 죽었다더라.

자기 몸에 불을 지르고 죽었다더라.

차에 치어 죽었다더라.

아무튼 뭐 죽었다더라.

죽었다더라.





그냥 가슴이 허전했습니다.

아저씨는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것 뿐일지도 모르죠.

할아버지가 술을 마시는 동안 아저씨는 혼자 동네를 돌아다니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렇게 혼자 히죽히죽 웃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만약에 만약에 다시 바보 아저씨를 만나게 되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사과하세요.

솔직히 나 그때 뚱뚱한 편도 아니었고, 여자한테 그런 말 하는 건 실례거든요.

그리고 미안해요.

가볍게 인사라도 나눌 수 있었는데 같은 사람 말을 무시한 제가 나빴어요.





이제 봄이 와요.

올해도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가겠죠.

아름다운 꽃잎과

받지 못한 사과와

전하지 못한 미안함과

무서운 편견과

사람의 무관심이

올해도 그렇게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가겠죠.





여름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작성자 : 만복빌라
출처 : 행복한 마조히스트(sweetpjy.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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