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예술가가 굶어 죽기 직전인 개를 전시하는 「굶어 죽은 개」를 발표했다.
게다가 이건 아직 그가 표현하려고 하는 예술의 준비 단계일 뿐이라고 선언했다.
「굶어 죽은 개」만으로도 비인간적인데
그것이 준비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발언까지 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그 예술가를 비난했다.
예술가의 블로그가 테러 당하고
예술가의 집에도 반대하는 무리가 찾아 갔다.
이런 상황이 언론에 계속 노출 되면서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었다.
예술가는 새로운 발표를 했다.
다음 전시회부터는 보건소에서 도살당할 개를 사용하겠습니다.
돕고 싶은 사람은 자유롭게 데려가세요.
다음 전시회 날, 미술관 개관 전부터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
머리에 끈을 두르고 어깨끈을 멘 데모 집단,
TV로 소식을 듣고 재밌겠다 싶어서 생전 처음 미술관에 구경 나온 일반인,
그리고 그것들을 우스꽝스럽게 찍으러 온 기자들.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이자, 미술관은 평소보다 빨리 문을 열었다.
미술관 문이 열리자마자 모두들 빠른 걸음으로「굶어 죽은 개」앞으로 모였다.
저번처럼 전혀 움직일 힘이 없는 개가 기운 없이 엎드려 있었지만
거기 세워진 팻말은 저번과 달랐다.
「돕고 싶은 사람은 자유롭게 데려가세요.」
전시회에 모인 모두가 조용히 개를 바라봤다.
많은 사람이 내리는 정류장인데 아무도 벨을 누르지 않는 버스 안의 분위기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갑자기 한 노부인이 손을 들었다.
「이 개를 데려가고 싶은데요」
그러자 안에서 예술가가 나오더니
개 목줄을 팻말에서 풀어 노부인에게 주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줄을 받은 노부인이 몸을 숙여「이제 괜찮아」라며 개를 쓰다듬자
자연스럽게 다들 박수를 쳤다.
그런데 예술가가 갑자기 또 나오더니 다른 개를 팻말에 묶었다.
다들 이게 대체 뭐하는거냐고 따지고 들었지만 예술가는 아무렇지도 않게
오늘은 열 마리 데려 왔으니까 이제 아홉 마리 남았어요, 라고 대답했다.
어이없긴 했지만, 아무튼 변함없이 차례차례로 손을 드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내가 맡을게, 아냐 내가 데려갈 거야, 모두들 앞 다투어 손을 들었다.
예술가는 개를 다 나눠주고 전시를 마쳤다.
매스컴은 그 모습을 몇 번이나 방영했고 전국민이 감동했다.
예술가는 그 후에도 열정적으로 전시회를 열었지만 「굶어 죽은 개」는 완성되지 않았다.
관람객들이 예술가가 준비한 개를 모두 데려갔기 때문이다.
개를 더 많이 준비해도 개를 데려가는 사람은 계속 나왔다.
그리고 어느덧 이런 소문이 돌았다.
그 예술가는 도살당할 개들을 구하려고 이런 전시회를 시작했지 않을까 하는.
그러던 어느날 예술가가 갑자기 전시회를 그만두었다.
전시회가 한창 유명해졌을 때라서 의아했다.
어떤 기자가 물었다.
「도살당할 개를 구하려고 이런 전시회를 한다는 소문이 돕니다만, 이게 사실입니까?」
예술가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만약 그게 목적이라면 왜 전시회를 그만두겠습니까?」
지당한 이야기였다.
「그럼 무엇을 위해 전시회를 열었고, 왜 그만두었습니까?」
예술가는 대답했다.
「그건 지금부터 알게 됩니다.
이제 준비가 끝났으니까 전시회를 그만뒀습니다.
여러분, 지금부터 일어날 사건을 기대해 주세요.」
전시회는 끝났다.
수수께끼에 쌓인 발언은 일시적으로 화제가 되었지만
그 후에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곧바로 잊혀졌다.
그리고 몇 개월 후.
기묘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국 각지의 공원에 야위고 쇠약해진 개가 차례차례로 방치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돕고 싶은 사람은 자유롭게 데려가세요.」라는 팻말과 함께.
개를 데려갔던 사람들 중에는
유행을 따르거나 착한 척 하고 싶어서 손을 든 사람들이 많았고
몇 개월이 지나자 개를 기르기 싫어진 것.
개를 이제 어떻게 할 지 고민하다 떠오른 건 예술가가 썼던 그 방법.
직접 버리거나 보건소에 데리고 가는 것보다는 마음이 편했다.
나쁜 건, 도와 준 내가 아니라
돕지 않고 그냥 보고 있던 녀석이라구.
이렇게 해서「굶어 죽은 개」가 완성 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