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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빌라

그리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인어공주 패러디)








안녕하세요?

아, 아, 듣고 계신가요?

잘 들리세요?

제 말을 좀 들어주세요.

아니, 들으셔야 해요.

듣고 계시죠?









저는 이 바다 속에 살고 있어요.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바닷물이 항상 저를 감싸주고 있답니다.

어린 인어들은 작은 물고기들과 숨박꼭질을 하며 놀고

젊은 인어들은 돌고래를 타고 로데오 놀이를 하곤 해요.

늙은 인어요?

글쎄요, 알게 뭐람.







한낮이 되면 햇빛이 바다 속을 황금빛으로 가득 채워 줍니다.

그러면 젊고 아름다운 인어공주 하나가 햇빛을 조명 삼아 맑디맑은 노래를 불러주지요.

그녀가 노래를 시작하면 수많은 물고기들과 인어들이 그녀를 에워싸고 환호성을 지르죠.

참 행복해 보입니다.

다들 너무 아름다워요.









하지만 저는 그들과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있는 여기는 아주 깊은 지하 동굴입니다.

저는 마녀거든요.

숨 막히게 아름다운 그들을

요술거울을 통해 구경하는 저는

그냥 마녀랍니다.









하지만 말이죠, 저도 인어공주였을 때가 있었어요.

윤기 흐르는 검고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그래요, 바로 저 자리!

저 공주가 노래를 부르는 저 자리가 바로 제가 노래를 즐겨 부르던 자리예요.

저도 저 자리에서 늘 행복한 노래를 부르며 마냥 행복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인어공주가 지금은 왜 마녀가 되어있는지 궁금하실 거예요.










3년 전이었어요.

제 생일이었지요.

보통의 생일과는 달랐어요.

그 날은 제게 처음으로 바깥세상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던 17번째 생일이었답니다.









저는 우연히 한 남자를 보게 되었지요.

낡은 조각배에 걸터앉아 먼 바다를 깊고 맑은 눈으로 바라보던

그 남자의 아름다움을 저는 아직까지 잊지 못해요.

하루 종일 그 분 만을 쫓아다니며 그 분의 모습을 제 두 눈에 똑똑히 새겨 넣었거든요.










그러다가 그 분은 큰 폭풍을 만났어요.

그 분의 배는 워낙 작고 낡은 배인지라 몇 번의 파도에 뒤집어져버렸어요.

저는 정신을 잃은 그 분을 육지까지 끌어올렸지요.

그리고 숨을 들이쉬지 못하는 그를 위해

그의 입술에 나의 입을 맞대고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네, 제 첫키스는 그렇게 짭짤하고도 달콤한 맛이었어요.

다시 바다 속으로 돌아온 저는 그 분을 다시 뵙게 될 날만을 애타게 기다렸답니다.









하지만 너무 힘들었어요.

그분의 깊은 두 눈,

가끔씩 비치던 사랑스러운 미소를

하루라도, 단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말라 죽어버릴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저는 흑마술사를 찾아갔지요.

인간이 되고 싶었어요.

인간이 되면 그 분을 마음껏 사랑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왜, 왜 그랬을까요.

혼자 그런 곳에 찾아가는 게 아니었는데,

바보같이 왜 그랬을까요.










인간이 되는 조건은 그 음흉한 놈과의 하룻밤이었습니다.

두려움에 몸을 돌려 나가려 했지만

그 어두운 동굴 안에서 마법을 쓸 줄 아는 그 놈에게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싫다고 발버둥 치다가 제 길고 검은머리가 듬성듬성 뽑혀나가고,

꼬리지느러미의 비늘들은 군데군데 벗겨져 검게 말라 붙어버렸습니다.

그 놈이 뭐라뭐라 중얼대자

참으로 쉽게도 제게 인간의 다리가 생겼습니다.

그 놈은 이제 막 생겨난 제 두 다리 사이를 거칠게 파고들었습니다.

생살을 칼로 찢는 듯 날카로운 아픔이 느껴지더니

핏내음이 비릿하게 풍겼습니다.

끔찍한 아픔에 울음 섞인 비명이 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목이 쉬고, 피가 터져 나오고, 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말이죠.

빈 비명에 머리가 울리고 배가 울리고 심장이 울렸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나봅니다.










눈을 떴을 때

흑마술사는 간 데 없고

매끈한 두 다리 대신에

검게 말라붙은 비늘이 잔뜩 달린 상처투성이의 꼬리가 제일 처음 보였습니다.


낯선 이에게 유린당한 공주는 더 이상 공주가 아니었지요.

아버지는 저를 감싸주지 않으셨고 저를 이 동굴로 쫓아버리셨습니다.










마음의 상처도, 몸의 상처도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지워지지 않네요.

제 무섭도록 강한 원망은 갈 곳을 잃었습니다.

죽지 못해 살았지요.

시간은 잘도 흘렀습니다. 

한 해가 흐르고 두 해가 흐르고 다시 또 한 해가 흘렀습니다. 

흐르는 시간과는 등을 돌린채로

저는 홀로 동굴에 앉아 흑마법을 연마했습니다.


네, 저는 그렇게 마녀가 되었습니다.

마녀가 된 저는 제 몸을 원망하며

이렇게 요술거울로라도 바다의 행복을 그리고 있습니다.










"아무도 안 계세요?"

3년 만에 처음으로 누군가가 찾아왔습니다.

두렵지만 조금은 기뻤어요.

"누구냐?"

아, 잊을 뻔했네요.

3년 전 그 날 이후로 제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져서 듣기 싫습니다.

괜히 저 손님의 목소리와 비교되는 것 같아 조금 슬픕니다.

아니, 아주 많이 슬픕니다.









누군가 했더니 막내 인어공주군요.

아마도 올해 17살이 되었을 거예요.

저 애는 날 기억하지 못합니다.

아버지께서 저에 대한 기억을 모두 지웠으니까요.










"인간이 되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인간이 되게 해주세요."





저 애도 인간을 사랑하나봅니다.





"네가 인간이 되게 만들어주면, 내게 뭘 주겠니?"










사실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애의 말에 괜히 화가 났습니다.

부럽기도 하고요.

이러면 안 되는데요.

그래도 난 그 애의 언니였는데요.

뭔가를 열심히 고민하는 그녀는,

그래요 제 동생은,

참 귀엽습니다.










"뭐든지요."

"그래?... 그럼, 네 목소리를 줘."










흠칫 놀라는 그녀를 보았지만

저는 목소리도, 가족도, 행복도, 사랑하는 사람도 모두 잃은 채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그녀는 아무런 노력도 없이 사랑을 얻는다는 것이 조금.

아니, 아주 많이 싫었습니다.

미안하지만, 정말 미안하지만 말이에요.

많이 싫었어요.










그녀는 제게 목소리를 줬고

저는 그녀에게 다리를 줬습니다.

저는 기절한 그녀를 그녀가 사랑하는 왕자가 살고 있는 성에 데려다주었지요.

그 왕자는 제가 3년 전에 반했던 그 분 이셨습니다.

3년 전에는 허름한 복장으로 뵈어 평범한 젊은이 인줄로만 알았는데요.

하지만 괜찮아요.

참으로 오랜만에 행복했습니다.

3년 만에 처음으로 손님이 찾아왔고

3년 만에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이렇게 예쁜 목소리도 얻었으니까요.









저는 세 달 동안 무척이나 행복했어요.

처음 한 달은 예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환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노래할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그 다음 한 달은 그 분과의 만남을 회상했습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더 그리워졌습니다.

그래도 그리워할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마지막 한 달 동안 저는 요술거울을 통해 그들을 보고 또 보고 계속 보았습니다.

그를 기억에서 지워낼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둘의 다정한 모습은 나를 미치게 만들었지요.
 








결국 저는 질투에 눈이 멀어 흑마법을 이용했습니다.

저는 인간으로 변해 그들을 찾아갔습니다.

이웃나라 공주님으로 신분을 속여 그에게 다가간 저는

온갖 화술과 노래솜씨로 그와 급속도로 가까워졌습니다.

반면에, 말을 못하는 그녀는 점점 소외당하기 시작했지요.











저를 든든히 지켜주는 그의 넓은 어깨가 저의 뒤에 있습니다.

저를 사랑스레 바라보는 그의 맑고 고운 두 눈이 저를 감싸 안았습니다.

저를 감동하게 만드는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저를 훑고 지나갑니다.

달콤하고 행복한 기류가 나의 몸을 휘감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 사랑스러움에 취해 있던 저를 흔들어 깨운 기억은

나의 동생.

막내공주에 대한 기억이었어요.

그녀는 사랑을 이루지 못하면 물거품이 되어버리지요.

공주가 죽지 않으려면 그녀 손으로 왕자를 죽이거나 사랑을 이루는 방법 뿐.

그 뿐이지요.











저는 정말 사랑이 그리웠습니다.

혼자인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눈부신 아침햇살이 침실 안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새들은 즐겁게 노래하며 분주히 날갯짓을 해댑니다.

그는 나른하게 덮쳐오는 잠에 취해 몸을 잔뜩 웅크리며 이불을 끌어당깁니다.

뭐라고 쉴 새 없이 웅얼거리는 독특한 잠버릇은 참으로 귀엽습니다.





"아침이에요, 어서 일어나세요"





고운 목소리로 당신을 흔들어대는,

작고 귀여운 나의 동생.

그와, 나의 동생.

둘의 모습은 언제 봐도 다정스럽고, 사랑스럽습니다.










여기는 깊은 지하 동굴입니다.

그리고 저는 마녀입니다.

숨 막히게 아름다운 그들을 요술거울을 통해 구경하는.

짧고 검은머리에 검은 비늘, 거친 목소리를 지닌.

이래봬도 잘 나가는 인어공주였던.

저는 행복한 마녀입니다.








작성자 : 만복빌라

출처 : 행복한 마조히스트(sweetpjy.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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