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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빌라

짬뽕







짬뽕






“그래, 그럼.”






그의 ‘그만 하자’는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빙긋 웃으며 말한다.

그대로 몸을 돌려 걷는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느린 걸음으로.

우스워 보이지 않게.

아주 자연스럽게.





그러나 그는 나의 뒤를 따라 오지 않는다.

나는 모퉁이를 돌자마자 벽에 등을 바짝 붙인다.

고개를 살며시 내밀어 아까의 사거리를 건너다본다.

아무도 없다.

나는 그만 다리가 풀려 주저앉는다.






공들여 한 화장 위로 한 줄기 물길이 트인다.

두 줄기. 세 줄기.

볼을 따라 흘러 턱에서 떨어지는 물줄기.

파운데이션을 한껏 머금어 황토색이 감돈다.

정확히는 트루베이지 13호겠지.

아, 검은색 물이 번진다.

내 랑콤 마스카라 이프노즈.

속눈썹을 떼어내 땅바닥에 던져버린다.

나쁜 자식.






집에 들어오자마자 거실에 대자로 눕는다.

두 눈이 따갑다.

코가 막힌다.

입이 마른다.

목이 아프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 너무나 간지럽다.

짬뽕이 먹고 싶다.







이런 비참한 상황에서 생각나는 게 짬뽕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게 가장 필요한 건 짬뽕이라는 생각 뿐 이다.

그런데 짬뽕 한 그릇이 배달이 될까?

욕을 먹을 것 같다.

침 뱉은 짬뽕이 배달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초라한 패배자의 몰골로 중국집에 들어가 “짬뽕 한 그릇이요!” 따위를 외칠 용기는 없다.

잠긴 목소리로 간신히 주문을 한다.







“짬뽕이요!”







문을 열자 웬 예쁘장한 남자애가 서 있다.

앳된 모습이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 했을까 싶은 배달원.

옛날 생각나네.

좋을 때 지.

야, 고놈 참 잘생겼네.

누나 너무 쳐다보지 마라, 원래 예쁜데 오늘은 눈이 부어서 별로야.

게다가 나 지금 쌩얼이잖아.






“얼마죠?”

“3500원이요”







것 참, 목소리도 꽤 괜찮네.

누나도 오늘 어떤 나쁜 놈만 아니었으면 목소리가 꾀꼬린데.

다음에는 우리 멀쩡할 때 보자.

나는 지갑을 뒤적이며 처음 보는 남자애를 머릿속으로 맘껏 희롱한다.







배달원이 철가방에서 꺼내 놓은 짬뽕 두 그릇.

잠깐만, 두 그릇?

“한 그릇 시켰는데요?”

그러자 그 녀석이 씩 웃으며 하나는 제 것이란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고 말문이 막혀 헛웃음이 나온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신발을 벗고 방안으로 휘적휘적 들어오는 그를 막을 도리가 없다.







“어, 이봐요!”

목이 아파서 큰 소리가 나오지 않는데.

“나 배고파요, 먹고 얘기해요.”

자기 집인 양, 그는 상을 펼쳐 놓고 그릇을 올린다.

랩을 능숙하게 벗겨주며 불겠다고 얼른 먹으란다.







얼떨결에 그 녀석과 마주 앉아 짬뽕을 먹는다.

“이렇게 하면 혀가 안 데여요.” 하더니, 단무지를 입에 물고 국물을 들이키는 녀석.

젓가락으로 단무지를 집어 들고 내게 들이밀기에 나도 따라 해본다.







앗, 뜨거워.

내가 노려보자 그 녀석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한다.

“단점은 입천장이 데인다는 거죠.”








작성자 : 만복빌라
출처 : 행복한 마조히스트(sweetpjy.tistory.com)




저는 짬뽕을 안 먹습니다.
매운 걸 싫어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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